OFF LINE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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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서울 도착해서 전화했더니 사랑한다고 하더라고.’
 
수화기 너머로 오늘도 그녀의 불만이 들려왔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대답 안했지.’
 
‘왜?’
 
‘사랑하지 않으니까.

‘.......’
 
‘왜, 꼭 남자친구 사랑해야 해?’
 
‘꼭 그런 건 아니지.... 다만 좀 상처받았겠다 싶어서.’
 
‘받아도 싸. 평소에는 그런 얘기도 안 하고 섹스 후에 지 사정하고 나서, 지 불안할 때만.......’
 
‘그딴 얘기 이제 좀 안 하면 안 되냐?’
 
나는 순간 쌀쌀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분명 몇 번이나 듣고, 맞장구를 쳤던 얘기였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잠깐 눈치를 살피다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미안해, 그냥 오늘 좀 기분이 별로라서. 내일 다시 통화하자. 잘 자고.’
 
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단 몇 초도 안 돼서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네가 있는데, 왜 이리 외롭고 괴롭지.’
 
나는 물음표를 크게 띄워 놓고 밤을 지새웠다.
 
5월이 되었다. 곧 더울 거라는 경고 같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고향 땅에 두고 온 남자와 버틸 필요도 없이 결별했다고 가볍게 말했다. 무신경하게 말했어도, 무거운 짐을 덜었다는 내색을 보이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녀는 차츰 억지로 시작한 일도 익숙해졌다고 했다. 거의 매일같이 늦은 밤 취해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내게 전화를 했다. 가끔은 우는소리도 들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벗어난 것 같아 괴롭도록 불안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만한 시간이 오면 뛸 듯이 가장 기쁜 시간이자, 자신이 가장 무능한 시간이었다.
 
‘상사가 술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야?’
 
‘아니.’
 
‘그럼 왜 이렇게 자주 마셔, 몸 상할 텐데.......’
 
‘말하면 너 전처럼 또 화낼 거면서.......’

‘내가? 내가 언제 화를 내, 화 안 낼게. 괜찮아. 말해 봐.’
 
나는 답 대한 기대를 품은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맘에 든 애가 있거든. 끝나고 걔랑 맥주 한 잔씩 해.’
 
‘아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감정이 모든 것을 토해 낼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재빨리 더듬어 가면을 찾았다.
 
‘근데 남자 여자가 술 먹고 달리 뭐 하겠어....... 근데 정말 괜찮아? 정말 화 안낼 거야?’
 
‘어 그럼~. 오히려 경사지.’
 
손쉽게 나온 거짓말이었다.
 
‘야 근데 서운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반년인데, 그런 걸 비밀로 하고.’
 
왜 이럴 때만 가면이 딱 맞는 걸까. 나는 밝은 톤을 한층 높여 말했다.
 
‘아 다행이다. 난 네가 화낼 줄 알고 얼마나 혼자 끙끙 앓았는지......’
 
‘쓰레기 같은 고민을 했고만. 뭐 하러 그랬어~.’
 
태연한 목소리와 다르게 가면 위로 눈물이 흘렀다.
 
처음엔 어깨가, 그다음엔 목소리가, 마지막으론 마음이 찌그러질 것처럼 떨려왔다.
 
‘근데 쉽게 마음을 안 준단 말이야. 이게 썸이 맞는지도 헷갈려. 나는 그저 섹스만 하기 적당한 여자인 걸까....... 그 사람은 숨기려고 해도 좋아하면 대부분 전해진다던데.’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쉴 틈 없이 나오는 수화기에서 입을 떼고 숨죽여 울었다.
 
‘듣고 있어?’
 
‘으응.’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나. 넌 오늘 뭐 했어?’
 
‘그냥. 있었지.’
 
‘그래도 너랑 이렇게 통화하니까 좋다. 서울 온 후부터 계속 공허했는데. 사랑한다 친구야.’
 
‘응.’
 
‘응이 뭐야 기껏 오글거려도 사랑한다고 했더니.’
 
‘나도.’
 
겨우 꺼낸 진심이었다.
 
‘나도 뭐? 그다음이 있을 텐데~?’
 
‘꺼져. 끊는다.’
 
‘아 뭐야~말해 빨리!’
 
버티기 힘들어 전화를 끊었다.
 
마음은 반드시 전해지는 거라니. 애초에 숨길 수 없던 것을 숨기려 했던 욕심에 대한 벌인가, 아니면 단순하게 윤기가 흐르고 크기가 들쑥날쑥한 빵을 얻으려고 도덕적으로 혼자서 순서를 지키려다 부스러기만 빨게 된 걸까.
 
그놈은 “섹스하자.” 태연하게 말했을까. 아니면 취한 상태에서 그녀의 몸을 더듬었을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무신경하게 요구할 수 있는 놈들에 비해,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려는 조심스러운 사람은 너무 많은 손해 본다.
 
부스러기를 빨고 주린 배를 잡고 있다고 해서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언제까지 부스러기를 빨아야 하지? 그보다 이 애를 내가 왜 좋아하게 된 걸까? 그보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였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많은 물음에 숨이 답답해져왔다. 그러다 순간 미친 사람처럼 끼룩끼룩 웃다가도 얼굴도 모르는 그놈의 이빨을 몇 개라도 부러뜨렸으면 싶었다.
 
나는 그렇게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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