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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맛] 
 
책에서 봤는데 소름이 끼치는 원인은 인물이나 사물 혹은 기억에 대한 이미지가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라고 했다. 어릴 적 나는 내가 음침하고 모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개인의 모양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었다. 윤리적인 이유로? 개인의 욕심?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원인이지만 그보단 생존에 관련이 깊은 절실함이었던 것 같다.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게, 대범한 사람에게는 대담하게, 쾌락을 쫓은 이에게는 웃을 거리를, 우울한 사람에게는 더 슬픈 위로를. 그런 식으로 내 얼굴과 마음을 바꾸다 보니 내 모습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저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는 가면이 여러 개 생길 뿐이었다. 얼굴이 하나도 감싸지지 않아서 1월의 추위를 견딜 자신이 없는 허울 좋은 가짜 얼굴. 그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질 때 그녀가 말을 걸었다.
 
라이스 : 잠수?
옥수수식빵 : 아니. 왜?
라이스 : 기껏 단채 대화방 만들었는데 왜 말 안 해. ㅎ
옥수수식빵 : 그러는 넌 왜 대화방에서 말 안 하고 접속했어?
라이스 : 그냥, 싫어. 강간수월해 닉값한다? 그 아저씨 자꾸 추파 던지고. 주마도 같은 지역 사니까 부담스럽게 보자고 하고.
옥수수식빵 : 그래, 온라인 상대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라이스 : 너는?
옥수수식빵 : 나?
 
나는 허겁지겁 가면을 고르고 있었다.
 
옥수수식빵 : 나도 믿지 마.
 
맞는 가면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라이스 : 그래도 묘하게 너는 신뢰가 간단 말이야. 동갑이라 그런가?
옥수수식빵 : 뭔 동갑이야. 너 91이잖아.
라이스 : 빠른 91이야! 띠도 원숭이라고. 우린 친구야 알았어!?
옥수수식빵 : 알았어.......
 
벼랑 끝 잔디가 살랑 이는 것을 보니 그래픽이 바람까지 실어 왔나 보다.
 
라이스 : 결국 섹스야.
 
나는 놀라 게임 화면에서 근처 유저가 있진 않은지 찾아보았다.
 
옥수수식빵 : 얘는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귓속말로 하던가 하지.
라이스 : 섹스가 대수냐. 그보다 그렇다고, 언놈을 만나든 바라는 건 섹스밖에 없어.
옥수수식빵 : 지금 남자친구가 그래?
 
나는 애인의 유무와 속 이야기를 듣기 위해 떠보듯 물었다.
 
라이스 : 응. 보면 만날 대실, 대실, 밥, 대실.......남자들은 다 똑같아.
옥수수식빵 : 안 그런 훌륭한 사람도 있어. 옥수수식빵이라고.......
라이스 : 파하하! 고추 작은 애들이 로맨티스트인 척한다던데 네가 그런 거 아냐?
옥수수식빵 : 아잇.......어릴 때 포경수술 잘못해서 그래!
 
나는 일단 광대 가면을 쓰고 그녀의 웃음이 더 자아내고 싶었다.
 
그 후로 그녀와 게임에서도, 메신저로도 쉴 틈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5000도가 넘게 끓는 용광로 앞에서도 휴대폰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그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서울로 상경해 게임 관련 일을 하는 것이 꿈이고, 꿈과는 다르게 가족들이 주는 부담 때문에 아무 곳이나 빠른 취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씩씩하고 굳센 상황과 텍스트에도 어딘가 한구석 쓸쓸함이 느껴졌다.
 
라이스 : 누나 드디어 서울 간다!!!
 
“라이스 서울 온다고?”
 
서른여섯 살의 ‘강간수월해’ 형이 물었다.
 
“네. 왔대요. 사정 때문에 원하지 않는 곳에 취직하러 온다는데. 그래도 축하주 사주려고요.”
 
나는 쇼핑카트를 밀며 대답했다. 줄여서 수월, 나, 그리고 다른 게임 회원인 서른 살의 모쓰가 오프라인에서 글램핑을 계획했고, 야영장 근처 대형마트에서 찬거리를 고르는 중이었다.
 
“프로필 보니까 딱 좋은 상태던데.”
 
수월이 말했다.
 
“뭐가요?” “무슨?”
 
“따먹기 딱 좋다고.”
 
“어휴. 철딱서니 없는 양반.” “노답 노인.”
 
모쓰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쇼핑카트를 밀었다.
 
“나만 쓰레기인 부분이냐?”
 
수월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뜀걸음으로 따라왔다.
 
우린 야영장 텐트에 도착해. 고기를 구웠다.
 
“캠핑 10년 차 PD님의 개굿딜, 꿀팁. 이 캠핑 고기는 말이야. 돼지목살이 최고야. 돼지 목살을 달라고 할 때, 돈까스처럼 한 번 눌러달라고 해. 그리고 구울 때 딱 다섯 번.......”
 
“탄다. 탄다!”
 
“우위익-”
 
우여곡절 끝에 구운 고기는 다행히 맛있었다. 잔뜩 사온 소주도 분위기 탓인지 잘 넘어갔다. 녹색 빈병이 발에 치이고, 고기의 비계만이 타닥타닥 소리를 낼 때 수월이 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너 고민 있지.”
 
“아뇨. 딱히.......”
 
“있잖아 이~, 마. 형이 별명이 선릉 관심법이야.”
 
“없어요. 진짜.”
 
“좋아하지?”
 
수월의 말 한마디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온라인 여자면 잘 해주지 마라. 한 번 주는 것도 아닌데 호구처럼. 고민 들어줘, 뭐 해줘, 뭐 도와줘~. 해서 백날 들어줘봐라 한 번 주지도 않는데.”
 
“경험담이에요?”
 
“윽.......잔다.”
 
수월은 대답을 회피하고 얇은 모기망을 거쳐 작은 간이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타들어가는 붉은 숯과 한참을 어울리고 나서야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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